찬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비트가루 한 봉지를 발견했습니다.
한때는 요거트에도 조금씩 넣어 먹고 물에도 타 먹었던 비트 분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이 뜸해졌고, 봉지는 찬장 안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소비기한은 이미 지나 있었습니다.
봉지를 들고 한참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걸 왜 샀더라?’
생각해 보니 비트와의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코로나 시기, 녹즙 대리점 사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는 지금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훨씬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풀무원 녹즙 대리점을 운영하던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대리점이 정말 바쁠 정도라고 했습니다.
원래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저는 사장님에게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먹어요?”
“먹고 몸이 좋아졌다는 분들도 있어요?”
사실 저는 조금 특별한 대답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의 대답은 의외로 담백했습니다.
“뭐든 챙겨 먹으면 좋죠. 안 먹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드시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꽤 현실적인 대답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그래도 뭔가 특별히 좋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제품 중 당시 관심이 가던 비트가 들어간 녹즙을 골랐습니다.
호주에서 먹었던 비트루트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호주에 살 때 비트루트를 음식으로 먹어본 적이 있어 비트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당시만 해도 비트를 일상적으로 자주 먹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샐러드나 음식에 들어간 비트루트를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침 그 무렵 저는 몸 상태를 보면서 ‘혹시 빈혈 기운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여기에 비트가 혈관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비트가 들어간 녹즙을 먹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꽤 오래 꾸준히 마셨습니다. 기억으로는 약 1년 반 정도였습니다.
가격은 솔직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매일 배달되는 제품이다 보니 하루 이틀 건너뛰면 냉장고에 녹즙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느 순간 중단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피 색을 유심히 봤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손가락을 베거나 작은 상처가 났을 때 흰 휴지에 묻은 피 색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비트가 들어간 녹즙을 꾸준히 먹던 당시, 제 눈에는 상처에서 나온 피가 이전보다 조금 더 밝고 선명한 빨간색처럼 보였습니다.
생리혈의 색도 전보다 밝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당연히 비트를 떠올렸습니다.
‘비트 때문인가?’
하지만 지금 건강 관련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관찰입니다.
혈액의 색은 산소화 정도를 비롯해 여러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고, 조명이나 주변 색, 휴지에 묻은 혈액의 양에 따라서도 우리가 인식하는 색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비트가 들어간 녹즙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비트가 혈액을 깨끗하게 만들었다’거나 ‘비트 때문에 피 색이 밝아졌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저는 분명 그런 변화를 느꼈고, 그 기억 때문에 몇 년 뒤 다시 비트를 찾아보게 됐습니다.
비트와 혈압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이유
몇 년 뒤 온라인에서 비트를 먹고 혈압이 낮아졌다는 후기를 여러 번 보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흔한 건강식품 후기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트와 혈압의 관계는 단순히 인터넷에서만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비트에는 식이 질산염이 들어 있습니다.
음식으로 섭취한 질산염의 일부는 우리 몸에서 아질산염을 거쳐 산화질소와 관련된 경로에 관여합니다.
산화질소는 혈관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입니다. 이 때문에 비트와 비트주스의 혈압 관련 효과를 살펴본 사람 대상 연구들이 진행돼 왔습니다.
여러 임상 연구와 이를 종합한 분석에서는 질산염이 풍부한 비트주스 섭취 후 혈압, 특히 수축기 혈압이 낮아지는 경향이 관찰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서 볼 부분도 있습니다.
연구마다 사용한 비트주스나 질산염의 양, 섭취 기간, 연구 대상자의 건강 상태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비트를 먹으면 혈압이 치료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혈압약을 대신하는 식품도 아닙니다.
다만 비트가 혈압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데에는 식이 질산염과 산화질소 경로라는 생리학적 이유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년 뒤 비트가루를 다시 샀습니다
혈관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비트와 혈압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접하면서 저는 다시 비트를 구입했습니다.
이번에는 매일 배달되는 녹즙이 아니라 보관하기 편한 비트 분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요거트에 소량 넣기도 하고 물에 타 먹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한 가지 건강식품을 매일 열심히 챙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찬장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소비기한이 지난 그 봉지를 다시 발견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찬장에는 이런 건강식품이 한 번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살 때는 분명 이유가 있었습니다.
피곤해서.
피부가 예전 같지 않아서.
혈압이 걱정돼서.
나이가 드는 것이 갑자기 실감 나서.
그리고 가끔은 정말 베리 길티한 음식을 먹고 난 뒤, 내 몸에 사과하고 싶은 마음으로 건강식품을 산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몸에 미안해서 건강식품을 샀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30대부터 건강과 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메딘 40+ 같은 피부 관련 건강식품도 찾아 먹어봤고, SeroVital처럼 노화와 활력을 내세운 제품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새로운 성분을 발견하면 ‘이건 몸에서 어떻게 작용하지?’ 하는 궁금증이 먼저 생겼습니다.
이것저것 직접 찾아보고 먹어보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강식품이나 영양제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필요한 영양소가 있거나 제 생활에서 보완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영양제를 먹습니다.
다만 40대 후반이 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좋다는 것 몇 가지를 골라 많이 먹는다고 반드시 더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식사는 엉망이고 잠은 부족한데, 몸에 좋다는 분말과 캡슐만 계속 추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이것저것 정리하면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운동.
기본적인 음식.
잠.
그리고 스트레스 관리.
너무 뻔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도 이런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네 가지가 건강식품 한 봉지를 주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입니다.
비트가루는 휴대폰으로 몇 번 누르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육을 만들려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잠을 잘 자려면 생활 리듬을 돌아봐야 하고, 기본적인 음식을 챙겨 먹으려면 냉장고를 열고 무언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도 쉬운 쪽을 먼저 선택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건강식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저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운동은 아닙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는 천천히 움직이고, 할 수 있는 만큼 근력운동을 합니다.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은지 식사를 살펴보고 잠을 제대로 잤는지도 생각합니다.
여전히 완벽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해보니 왜 사람들이 건강식품을 먼저 사는지 더 잘 알 것 같습니다.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트 효능을 찾아보다가 결국 내 생활을 보게 됐습니다
찬장 속 오래된 비트가루를 발견하면서 저는 비트의 효능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비트의 식이 질산염과 산화질소 경로는 흥미롭고, 혈압과 관련한 사람 대상 연구도 계속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비트가 운동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잠을 대신 자주지도 않고, 매일의 식사를 대신해 주지도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식품은 우리의 생활을 보완할 수는 있어도 생활 자체를 대신하기는 어렵습니다.
30대의 저는 ‘무엇을 더 먹을까’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40대 후반의 저는 조금씩 질문을 바꾸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제대로 먹었나?’
‘이번 주에 근육을 움직였나?’
‘잠은 충분히 잤나?’
‘내 몸을 너무 오래 긴장시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기본을 어느 정도 챙긴 뒤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때 건강식품과 영양제를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려고 합니다.
어제 버리게 된 오래된 비트가루 한 봉지는 제게 꽤 재미있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나는 왜 이것을 샀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마 앞으로도 저는 새로운 건강 성분을 보면 궁금해할 것입니다.
다만 예전처럼 ‘이것만 열심히 먹으면 조금 더 건강해지겠지’라고 쉽게 기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몸은 내가 매일 어떻게 먹고, 움직이고, 자고, 살아왔는지를 꽤 오래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 이 글은 개인적인 건강식품 섭취 경험과 일반적인 건강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비트 및 비트주스는 질병의 치료를 대신하지 않으며, 혈압약을 복용 중이거나 저혈압이 있는 경우처럼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섭취 전 의료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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